<서문>
법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시절, 행정법 교수님께서 ‘중세의 대학 교육의 시작이 의학, 법학, 신학이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문제가 생긴 사람들이 의사, 판사, 사제를 찾아왔을 때 즉각 해결책을 알려줄 수 있도록 의학자, 법학자, 신학자가 사전에 시간을 들여 깊이 연구를 해서 미리 좋은 해결책을 만들어 둔다는 취지였습니다. 예컨대 열이 나서 찾아온 사람에게 의사는 타이레놀을 드시라고 말해 주는 것으로 그만이고, 그 사람을 붙잡고 발열 증상과 해열제의 약리작용에 대해 장기간의 심도 있는 연구를 할 필요는 없고, 그렇게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신속한 치료를 위해 의학자는 미리 발열 증상의 원인과 해열제의 약리작용에 대해 깊이 연구해서 타이레놀이라는 치료제를 만들어 둔다는 것입니다.
위헌이라는 병에 걸려 열이 나는 법률이 재판관을 찾아오면 타이레놀만큼이나 흔하게 사용하는 치료제가 과잉금지원칙입니다. 헌법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의학자들이 타이레놀을 개발하기 위해 해열 효과가 있는 물질들을 깊이 연구하듯이,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위헌 치료제에 관해 깊이 연구하여, 실무에서 재판관이 즉시 쉽게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타이레놀처럼 잘 듣는 약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구의 일환인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리고 재구성하여 좀 더 알기 쉽게 정리한 책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서 좋은 약을 개발한다 하여도, 그것만으로 실제 상황에서 좋은 치료 효과를 얻어내리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수술도구나 약도 중요하지만, 의사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수술이나 치료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위헌성을 제거하는 수술인 헌법재판의 성패는 재판관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라는 특수한 재판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회가 만든 법률의 효력을 없애버리는 재판이고, 특히 재판 과정에서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재판관의 가치판단이 크게 개입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재판관의 능력과 경험에 더해 ‘재판관의 양심과 용기’라는 요소가 재판의 성패에 큰 영향을 줍니다.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위헌 치료제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선 제1장에서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위헌 치료제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퍼져 있고 캐나다와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지 개략적으로 살펴봅니다. 그런 다음 제2장에서는 법학의 관점에서 과잉금지원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그 이론을 세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제3장에서는 법실무의 관점에서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위헌 치료제를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대법관들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헌법재판관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사용해왔는지 대표적인 판례들을 통해 살펴봅니다. 굳이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과잉금지원칙 적용 경험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은 흔히 ‘정치적 사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헌법재판이 정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이 정치라면 ‘정치적 사법’이 아니라 ‘사법적 정치’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헌법재판도 사법인 이상 그 본질은 ‘사전에 미리 정해 둔 규범’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을 하면서 재판관 스스로 그때그때 판단 기준이 될 규범을 만들어 써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사법적 정치’에 해당됩니다. 헌법재판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심사기준 중 하나인 과잉금지원칙의 내용이 사전에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재판관이 헌법재판을 할 때마다 그때그때 과잉금지원칙의 구체적인 내용을 만든다면, 그것은 사법보다는 정치에 가깝습니다. 정치는 미래에 우리 공동체가 지킬 규범을 만들어 두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예측을 기반으로 그때그때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법은 정치가 미리 만들어 둔 규범을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즉, 정치적 의사결정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고, 사법적 의사결정은 과거를 향합니다. 이 시간 순서가 바뀌면 사법은 정치가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헌법재판의 기준으로 미리 만들어 둔 규범인 헌법은 다른 하위법령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과잉금지원칙도 대한민국헌법 제37조 제2항에 간략하게 규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의 경우, 헌법학자와 헌법실무가의 역할과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과잉금지원칙 법리는 합헌과 위헌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잉금지원칙의 구체적인 법리를 구축하는 것은 헌법 제37조 제2항 각 호를 새로 만들어 내는 헌법제정과 다름이 없습니다.
과잉금지원칙에 관해서는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고, 판례도 상당히 많이 쌓여 있습니다. 이 책은 앞선 세대의 그러한 노력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조명하기에도 벅찬 시도입니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성과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그것을 디딤돌 삼아 단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려고 애써 보았습니다. 이 책과 이 책 이후에 이어질 여러 후속 연구가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위헌 치료제를 더 정확하게 사용하는 길을 열어 위헌이라는 질병을 법률 세계에서 몰아내는 데에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필자가 약 9년 동안의 판사생활을 마치고, 2017년부터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연구관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담당한 법령사건에서 출발했습니다. 미흡한 연구보고서를 때로는 너그럽고, 때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봐주시고 이끌어 주신 당시 부장연구관이셨던 이승환 헌법재판소장비서실장님, 당시 선임부장연구관이셨던 김정원 헌법재판소 사무차장님, 그리고 당시에 제가 전속연구관으로 모셨던 이진성 헌법재판소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연구보고서에서 시작된 작은 아이디어를 거대한 박사논문으로 탈바꿈시키는 긴 여정을 이끌어 주신 지도교수님이신 전종익 교수님과 논문심사과정에서 혜안을 베풀어주신 송석윤 교수님, 윤영미 교수님, 이효원 교수님, 전상현 교수님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박사논문을 책으로 펴낼 수 있게 해주신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와 유지혜 선생님을 비롯한 경인문화사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책상에 혼자 앉아 박사논문을 쓰고 이 책을 쓰는 데에 들인 시간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할 시간을 희생한 시간입니다. 이 순간 제 머리에 떠오르는 한 분 한 분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평생 동안 희생과 인간애와 양심의 모범을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 그리고 아빠의 일시적 부재를 견뎌준 하영이, 호안이, 은효에게 이 기회에 각별한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남깁니다.
2021년 여름
이재홍 적음
<차례>
제1장 서론
제1절 과잉금지원칙의 범지구적 전파
Ⅰ. 전세계의 사법부로, 그리고 학계로
Ⅱ. 캐나다 연방대법원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상황 개관
제2절 이 책의 내용
제2장 과잉금지원칙의 이론
제1절 이론적 분석의 토대
Ⅰ. 법적 판단의 단계적 구조
Ⅱ. 법률의 위헌 여부 판단의 단계적 구조
Ⅲ. 위헌심사척도
Ⅳ. 위헌심사강도
Ⅴ.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Ⅵ. 위헌심사강도와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의 비교
Ⅶ. 소결
제2절 과잉금지원칙의 논증구조 이론
Ⅰ. 개설
Ⅱ. 목적의 정당성 원칙과 수단의 적합성 원칙
1. 목적의 정당성 원칙
2. 수단의 적합성 원칙
Ⅲ. 피해의 최소성 원칙
1. 의의
2. 피해의 최소성 원칙의 논증구조
Ⅳ. 법익의 균형성 원칙
1. 의의
2. 법익의 균형성 원칙의 논증구조
3. 법익의 균형성 원칙의 지위
Ⅴ. 피해의 최소성 원칙과 법익의 균형성 원칙의 차이
1. 차이점1: 입법목적 달성 정도를 주어진 목표치로 보는지
2. 차이점2: 판단의 주안점이 헌법상 권리 제한의 심각성인지
3. 차이점3: 비교의 방법, 대상, 성격
제3절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이론
Ⅰ. Alexy의 이론
1. 입법자의 재량이론
2. 형량 제2법칙
Ⅱ. Rivers의 이론
1. 개관
2. 형량 제2법칙의 구체화
3. 과잉금지원칙의 하위 원칙별 적용강도의 다양화
Ⅲ. Klatt과 Meister의 이론
1. 개관
2. 분류형량(classification balancing)
3. Alexy의 형량 제2법칙으로부터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의 분리
4. 비교형량과 사법심사를 구별하는 2차원 모형(the two-level model)
Ⅳ. Brady의 이론
1. 이론의 기본 구조: Alexy의 구조적, 인식론적 재량 이론
2. 구조적 deference
3. 인식론적 deference
4. deference의 정도의 결정
Ⅴ. Kavanagh의 이론
1. deference의 개념
2. deference의 결정 방법
Ⅵ.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조절의 이론적 근거 : 권력분립원리
1. 권력분립원리에 대한 검토 필요성
2. 권력분립원리에 따른 국가기관간의 분업과 협동
3. 권력분립원리와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제3장 과잉금지원칙의 실무
제1절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과잉금지원칙 실무
Ⅰ.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 개관
1. 캐나다와 캐나다 헌법
2.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권과 캐나다권리자유헌장
3. 캐나다권리자유헌장 제1조와 Oakes 판결
Ⅱ. 캐나다연방대법원의 과잉금지원칙 논증구조
1. Oakes 심사의 논증구조
2. 최소피해성 논증구조의 변형
3. 효과의 비례성의 재정식화 : Dagenais v. Canadian Broadcasting Corp. 판결
4. 최소피해성의 비대화 및 효과의 비례성의 공동화(空洞化)
5. 새로운 흐름의 시작: Hutterian Brethren 판결
6. 최소피해성, 효과의 비례성 논증구조에 대한 학계의 평가와 전망
7. 최소피해성과 효과의 비례성 논증구조에 대한 이론적 분석
Ⅲ.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1. 캐나다에서의 deference 법리의 시작: 행정소송
2. Oakes 심사에 있어서의 deference 법리
3. Oakes 심사에서의 deference에 관한 학설
4. Oakes 심사에 있어 deference 법리에 대한 이론적 분석
제2절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과잉금지원칙 실무
Ⅰ.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과잉금지원칙 논증구조
1. 논증유형1: 미분화형 논증유형
2. 논증유형2: 완전 분화형 논증유형
3. 논증유형3: 불완전 분화형 논증유형
4. 소결: 완전 분화형 논증유형 선례 계승의 필요성
Ⅱ.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
1. 입법재량 존중의 세 가지 양상
2. 헌법재판소 결정례상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에 관한 학설
3. 헌법재판소 결정례상 입법재량 존중에 대한 평가
4. 과잉금지원칙의 적용강도의 다양화
제4장 결론
제1절 연구결과의 종합정리
제2절 과잉금지원칙 연구의 좌표와 전망